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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일상 속으로

나 자신의 평생 글쓰기를 돌아보며(2) - 무엇을 쓸 것인가? (feat. 인생 2막의 시작)

by 마법사엘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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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을 잘 쓰시네요' 라는 말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말들의 대부분은 면전에서이기 보다는 인터넷에 블로그 등을 통해 올리는 글의 댓글 등을 통해서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그럴 테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글들은 그야말로 '인스턴트' 다. 떠오르는대로 휙 갈겨쓰고 글 쓴 나 자신조차 다시 읽지 않고 그냥 '올리기' 버튼을 누르고 끝내게 된다.

 

그래서 글을 잘 쓴다는 댓글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감흥은 오지 않는 듯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주고 댓글까지 달아준 분에 대해서는 무척 감사함을 느낀다. 꼬박꼬박 감사의 댓글도 단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스쳐지나는 생각이 있는데 글을 쓰는 문자와 관련된 기술적 행위와 더불어 그런 문자도구에 담기는 내용에 관해서다. 즉 문자도구는 그릇이라고 치면 그에 담기는 내용은 음식물이 된다.

 

그렇다면 그릇이 중요할까? 음식이 중요할까? 굳이 그릇과 음식을 따지자면 음식일 테고, 맛있는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는다면 금상첨화일 테다. 한편으로 또 생각해보면 그릇은 적당히 예뻐도 되지만 음식이 좋아야 하며 그릇은 속성으로도 예쁘게 만들 수 있지만 그에 담기는 음식이 맛있어지려면 작가의 생각 정리, 경험의 숙성 등 나름의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무엇을 쓸 것인가?

 

음식이라면 그 목적은 너무나 분명하다. '맛' 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그릇에는 온갖 목적을 가진 다양한 것들이 담길 수 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것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방법도 다르다. 이것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저자가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알맹이가 되는 내용의 범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앞에서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라고 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범주로 나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둘 중의 하나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당신은 독자인 타인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첫째로 즐거움이다.

 

 

이것은 즐거움일 수도 있고 감동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런 범주에 해당되는 글에는 주로 예술적 창작물들이 포함된다. 시와 소설, 희곡과 시나리오 같은 글들이다.

 

 

필자는 최근 모자랐던 고전 읽기의 일환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 를 읽었는데 베르테르는 비교적 초기작으로 사랑의 열정을 표현했고 파우스트는 말년의 역작으로 상당한 깊이를 보여주는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괴테는 그 유명한 명성에 걸맞게 걸출한 이야기꾼인 것만은 틀림 없었다.

 

 

필자의 글쓰기에 관한 다른 글 (https://kali9.tistory.com/82 ) 에서 습작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써보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한계를 느끼고 있는 바, 타고난 이야기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ㅜㅠ)

 

아마도 당신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면 이미 출간이나 등단한 작가이든 아직 아니든 간에 내면으로부터 넘쳐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미 글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작가가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두번째는 메시지이다.

 

이 범주의 범위는 그야말로 광대무변할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주장일 수도, 정치적 메시지일 수도, 경제에 관한 지식일 수도, 자기계발을 위한 방법론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신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체득된 경험의 일부일 수도, 의도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가다듬은 어떤 분야의 내용일 수도 있다.

 

광대한 벌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것은 오롯이 당신 자신만의 몫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잠시 필자의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

 

어린 시절의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지극히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병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어느날부턴가 내가 돌봐드려야 할 대상이었고 하나뿐이던 동생도 어릴 때부터 자주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면 적당히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고, 늙어서 죽어야 할 나자신의, 그 어떤 존재의 미래도 뻔해보였고 무의미해보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죽고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더 큰 짐을 지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윤회의 패러다임이 나를 짓눌렀다. 영원히 큰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신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한줄기 유일한 희망과 빛으로 다가왔던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해탈하면 영원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면 된다! 중2때의 일로 기억된다. 1985년이었던가.

 

당시 대중적으로는 명상이라는 말도 낯설고 단전호흡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유행이 시작되는 때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우리 전통의 선도의 맥을 잇고 있던 먼 친척뻘 되는 분과 만나게 되었고 나는 명상과 호흡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차저차(?) 하여 명상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당시에도 우후죽순 산재하던 온갖 단체를 경험하며 대학을 마치고 석사 논문까지 마치고 바쁜 일상을 접고 잠시 한가롭게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스물다섯살 때의 일이다.

 

밝은 햇살이 내 방으로 비춰주던 어느 낮의 일이다.

 

'그 일' 은 밤의 도둑처럼 찾아왔다.

천지가 개벽을 하듯이 세상이 뒤집어졌다.

10년 동안 찾던 근원적 질문의 답이 엄청나게 밝은 빛과 함께 쏟아졌다.

나의 주변도, 나의 몸도, 나의 마음도 그 빛과 함께 전율하며 춤을 추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평생을 궁구하던 답을 찾았으며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고 소멸되었다.

 

......

당시에는 몰랐지만 훗날 이 경험은 붓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팔정도 중 8번째 항목인 바른 선정(삼매), 그 중에서도 첫번째 단계인 초선(初禪) 임을 알게 되었다.

......

 

몇 달의 시간이 지나고 극적인 전율과 희열과 환희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 쯤 나는 스스로 너무나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면 (고해苦海),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나 혼자 깨달아서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작 2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사회초년생에 불과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편에서 계속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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