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 지극한 마음으로 비우고...
"비어있음의 극치에 이르면, 고요함의 독실함을 지켜라.
만물이 모두 일어날 때, 나는 (만물의) 되돌아감을 본다.
무릇 만물은 무성하지만 저마다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靜' 이라 하니 이것을 '명命'을 회복한다고 한다.
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常' 이라고 하며,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상'을 알지 못한 채 함부로 흉악한 일을 일삼게 된다.
상을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곧 공평해지며, 공평하면 곧 왕 노릇하게 되고, 왕 노릇 하게 되면 곧 하늘(자연)처럼 되며, 하늘처럼 되면 곧 도에 부합되고, 도에 부합되면 곧 장구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첫구절이 핵심이다. 옮긴이(김원중)의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 듯한데, "지극한 마음으로 비우고, 마음의 고요함을 돈독히 하라" 정도로 의역해서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핵심은 비움이고 고요함이다.
* 오래 전 읽었던 김학주 번역판 노자도 가끔 참고로 하는 편이다. 당시에는 김학주 번역판도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지금 다시 보니 번역은 직역에 가까워 매끄럽지 못한 편이라 해도 김원중 번역판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더 와닿는 듯하다.
수행과 명상의 핵심은 '비움'이다. 비우기는 비우는데 무엇을 비움인가? 마음의 독성을 비움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욕심, 분노, 어리석음인 탐진치를 비움이다. 이것을 모르고 그저 수련을 한다 명상을 한답시고 세상을 방황하면 마음이 비워질 리도 없고 고요함을 찾을 수도 없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거꾸로 간다. 관념과 욕심과 분노를 키운다.
필자의 제자분 중에 그분의 남편도 평생을 명상에 매진하던 분이 있었다. 부인이 필자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었고 남편은 다른 명상을 부인보다 한참 전에 시작해서 해오던 상태였다. 남편은 부인이 자신과는 다른 형태의 수행을 하는 것이 늘 못마땅했다고 한다. 어느날 부인에게 연락을 했으나 며칠간 확인을 하지 않아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됐었다. 다행히도 며칠 후 연락이 닿았다. 며칠간 연락 두절이었던 이유는 남편이 화가 나서 부인의 휴대폰을 고층 아파트 창밖으로 던져서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째서 남편분은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물었다. 부인의 휴대폰 알람이 울려서 시끄러웠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 부부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남편에게서 직접 설명을 듣지 못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0년 해왔다는 명상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있은 얼마 뒤, 부인에게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굳이 남편과의 관계가 좋아지리라는 효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그 처방 후 즉시 남편과의 관계가 좋아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인의 수행시간은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전에는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각방 생활을 하면서 퇴근하자 마자 자기방으로 들어가 수행에 매진했으나 남편과의 사이가 좋아지면서 수행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가 보다.
탐진치가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라고 했고 비워나가야 할 주된 대상이라고 했다. 스스로 잘 비우며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려면 자기 마음에 비치는 욕심과 분노를 보라. 어리석음은 일단 잘 보이지도 않고 애매한 대상이니 욕심과 분노부터 살피자. 세속에 몸담고 재가수행자로 살아가면서 이 둘을 적당히만 잡아도 크게 비운 마음일 것이다.
일단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서 욕심은 상대적이다.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법정스님의 대표 저서인 무소유라는 제목처럼 무소유할 수도 없다. 절간에서 최소한의 먹을 것 입을 것 책임져주는 스님들도 무소유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가까이서 살펴보면 스님들의 빈부격차도 굉장히 심한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물며 직업도 가지고 미래도 대비하고 가족도 먹여살려야 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욕심을 완전히 비운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려면 돈은 벌어야 한다. 이왕이면 같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더 많이 버는 것이 낫다. 미래에 대비해 얼마간의 저축도 필요하고 재정적인 계획도 필요하다. 다만 돈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더 많이 버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탕진해서도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를 향하는 수행과 아래를 받쳐주는 현실의 균형이 필요하다.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현실을 지탱하고 얼마만큼의 돈을 버는 것이 목표였다면, 현재는 큰 흐름 안에서 작은 수입의 증감과 씀씀이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욕심은 줄어든 것이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교육과 성적에 대한 집착이 조금이나마 줄었다면 그 또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욕심은 상대적이지만 분노는 절대적이다. 자기 마음 속의 화, 겉으로 뿜어내는 화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밖에서 내는 화도 그렇지만 특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내는 화를 유의해서 살펴보라. 더 나아가 겉으로 뿜어내지는 않더라도 자기자신의 마음 속에 가두어둔 화를 살펴라. 화는 모르겠지만 우울하다고? 화와 우울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로 전혀 다른 에너지가 아니다. 화가 특정한 에너지의 양(陽)적인 측면이라면 우울은 그것이 음성으로 변한 모습이다. 화는 주로 밖으로 내뿜거나 억누르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몸과 마음의 병을 일으킨다. 음적인 우울이 극강해지면 병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파괴한다 - 이것이 자살로 이어지는 이유다.
"만물이 모두 일어날 때, 나는 (만물의) 되돌아감을 본다.
무릇 만물은 무성하지만 저마다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靜' 이라 하니 이것을 '명命'을 회복한다고 한다.
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常' 이라고 하며,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상'을 알지 못한 채 함부로 흉악한 일을 일삼게 된다."
만물은 뿌리, 그 근본, 근원인 본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생명 있는 생물들은 죽고, 사체는 분해되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자연自然 - 노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한 - 의 이치다. 그러나 만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수행을 통해 살아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돌아갈 때 정靜 - 고요하게 되며 이것을 명命을 회복한다고 할 수 있다. 명命은 바른 방향을 뜻한다. 바른 방향은 곧 도道이며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常이라고 하며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굳이 따져본다면 상常과 명明은 도道의 특성이다. 도는 '항상' 존재하며 만물을 낳고 바탕이 된다. 도는 모든 이치를 꿰뚫고 낳고 포용하므로 밝음이다. 물론 도는 상대성에도 논리에도 귀속되지 않으므로 무상無常도 무명無明도 도의 한 부분일 것임이 틀림 없다.
"상을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곧 공평해지며, 공평하면 곧 왕 노릇하게 되고, 왕 노릇 하게 되면 곧 하늘(자연)처럼 되며, 하늘처럼 되면 곧 도에 부합되고, 도에 부합되면 곧 장구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왕 노릇은 세상의 왕, 일국의 왕 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왕은 세상일을 뜻대로 하는 존재를 뜻한다. 이것을 여의如意라고 부른다. 용이 구슬을 물고 하늘로 승천한다. 이 구슬이 여의다. 손오공이 작게도 크게도 만드는 봉을 여의봉이라 부른다.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보통 여의주, 여의봉에 대한 단어는 특정한 이야기(용의 승천이나 서유기) 속에서만 익숙하지만 의외로 여의라는 단어는 우리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여의치 못하다' 라는 표현을 우리는 자주 사용한다. 뜻대로 잘 안될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여의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됨을 뜻한다.
붓다는 세상의 여덟가지 근본 괴로움에 대해 설명하였다. 즉 생로병사의 네 가지를 비롯해 네 가지 추가되는 괴로움이다. 이별리고 -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원증회고 -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마주침, 구부득고 - 원하는 것을 (모두) 갖지 못하는 괴로움, 오온성고 -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존재하기에 괴로움.
붓다도 살아 생전에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붓다의 일족인 석가족이 멸족함을 막지 못한 일이 그렇다. 하물며 세상속에서 물질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룬다는 것이 가능할까?
여의의 참뜻은 마음에 달려있다. 앞에서 욕심과 분노를 완전히 비워야 한다고 했다. 사실 분노는 욕심에서 나오고 욕심은 '나' 에게서 나온다.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 내 의도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욕심이다. 그런 욕심대로 잘 되지 않기에 답답하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이다. 반대로 욕심을 완전히 비운 상태라면? 결국 그것은 '나' 라는 그릇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그럴 때 세상 만사 좋고 나쁨이란 없다. 나를 위해 일어나야 할 일이 없는데 희비를 일으킬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은 온전하다. 마음이 비워지니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만 보이던 세상이 자신 안에 담긴다. 이것이 참된 여의이며 궁극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크게 비워지면 왕 노릇이고, 곧 하늘이고 자연처럼 된 것이며, 도에 부합되고,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아니, 죽더라도 무엇이 위태로울까?
보통 길흉화복이란 표현을 쓴다. 어떤 사람들은 수행을 통해 길과 복을 바라고 흉과 화를 피하려 한다. 물론 인지상정이기는 하지만 그런 상태를 목적으로 하고 그리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한계를 가지며 바른 수행이 아니다.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고 비워진 마음은 비워진만큼 길흉화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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