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7)] 22장 곡즉전曲則全 - 명상과 불교수행으로 풀어 쓴...
22장 곡즉전曲則全 - 굽으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아지며, 움품하게 되면 채워지고 해어지면 새로워지며, 적으면 얻게 되고 많아지면 미혹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일一'을 품어 천하의 본보기가 된다.
스스로도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아지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드러나며,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功)을 소유하고, 스스로 뽐내지 않으므로 오래간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에서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옛날에 이르기를 '굽으면 온전해지고'라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길흉화복을 따지는 주역의 64괘 중 첫번째 괘를 건위천(乾爲天) 이라 부른다. 단순하게만 보면 위와 아래 각각 음양으로 표시되는 주역괘 중에서 둘 다 양이고 하늘을 뜻하여 가장 양기가 강한 모습이다. 가장 높은 정점에 이른 형상을 보여준다. 일견 보기에는 '좋다'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깊이 짚어보아야 한다. 정점에 이른 모든 것은 하락하는 길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상대적이다. 어느 잘나가던 사업가가 크게 일이 잘못되어 많은 재물들을 잃고 중산층 정도로 전락했다고 하면 그 상실감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할 것이다. 반대로 평생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가 자기집 한 채 마련했다고 하면 그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노자는 도道의 관점에서, 가장 큰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강하고 곧은 것이 좋다. 채워지고 새로운 것이 좋다. 많은 것이 좋다. 성공을 향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달려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반드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절대적이지 않다. 상대적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다. 그야말로 새옹지마다. 그렇기에 굽으면 온전해질 때도 있고, 구부려야 곧아질 때도 있고, 움푹하면 채워지며, 낡으면 새것이 들어온다. 개인의 좁은 관점이 아니라 가장 큰 우주, 도道의 관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긍정적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성향에는 우울을 넘어서 자살 등의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 긍정적이라면 계속 긍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런 집착은 더 높은 성장을 가로막는다. 긍정은 양성, 즉 플러스이며 부정은 음성인 마이너스다. 음과 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은 우주의 근본 이치다.
훗날 붓다가 된 싯달타 왕자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을까?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바탕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주변에서 만류했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와 명예, 지위 등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날만큼 강한 의지가 있었다. 온갖 고행을 스스로 선택하면서도 진리를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꺽지 않았다. 이런 측면은 큰 자존감과 자기긍정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세상을 보았다. 그렇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만약 그가 긍정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눈앞에 보여지는 세상의 괴로움을 긍정이라는 장막으로 덮어버렸을 것이다. 예쁘게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해서 넘어갔을 것이다.
오래 전 필자의 제자였던 여성 사업가인 분이 계셨다. 여성으로서는 드물게도 억대 연봉을 받을만큼 나름 크게 성공 가도를 달리는 분이었다. 그렇게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만큼 '긍정적 합리화'에도 도가 텄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건 이래서 괜찮아요, 저건 저래서 괜찮아요 하며 합리화해서 넘기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분을 처음 만나고 일년쯤 지나서였던가, 필자는 그분에게 나름 따끔하게 충고를 던졌다. 이제 그런 합리화는 그만 하실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말을 듣고서 그분은 우물쭈물하며 넘어갔다. 그런 합리화는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 정신무장의 수단이다. 때로는 그런 도구가 필요할지 몰라도 무조건적인 방어기제로 작용하도록 습관화되어 있는 것은 자기성장의 장애가 된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은 화려함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면의 곪은 상처들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녀는 지금도 깊이 은둔하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해 스스로 치유의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성인은 '일一'을 품어 천하의 본보기가 된다."
불가에서 자타불이(自他不二)라고 한다.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말이다. 엄지, 검지, 중지,... 다섯손가락에는 각각의 이름이 있다. 손가락의 차원에서 보면 각각이 서로 자自가 아닌 타他이다. 하지만 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는 불이不二이며 하나다. 물론 '나(한 사람의 존재)'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개개인의 관점 - 개의식個意識 - 에서 봤을 때 나와 남은 별개이지만 더 큰 의식, 전체 의식, 도道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 자타는 불이이다. 그래서 성인은 '일一', 즉 도道를 품어 천하의 본보기가 된다. 굽고, 온전하고, 구부리고, 곧고, 움푹하고, 채워지고, ...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높고 낮고, 긍정적이고 부정적이고...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하나'로 품는다. 길하고 흉하다거나, 화이고 복이라거나 하는 모든 상대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이전 장에서 필자는 참된 공부가 길함과 복을 쫓는 것이 아니라 길흉화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붓다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 다짜고짜 욕을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누군가 당신에게 선물을 했는데 당신이 그 선물을 받지 않고 되돌려 보낸다면 그 선물은 누구에게 가겠소?"
선물은 보낸 이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 그가 보낸 욕과 시비는 붓다에게 가지 않았다. 욕한 이에게 되돌아갔다.
붓다는 비유로써 답했지만 이 에피소드 자체는 비유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붓다의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붓다는 욕과 시비를 던진 이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음이 틀림 없다. 즉 자타불이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거친 언사로부터 다툼이 없었고 붓다 자신의 내면에서도 다툼이 없었을 것이다.
성인은 상대적인 것들을 모두 품으므로 다툴 일이 없다. 자신의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도 다툴 일이 없는 것이다. 일一을 품어서, 도道와 하나이므로, 그 넓이가 한량 없으므로.
- 明濟 전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