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물질적 정신적 변화가 가중되고, 점점 더 기하급수적으로 빠른 싸이클로 변화하면서 각각의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도 날로 커져가는 듯합니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듯, 이런 변화는 정보매체의 집약과 기기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쏟아지는 정보와 감각적 자극의 홍수로 인해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날로 커져갈 것입니다.
이런 환경적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명상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더 나아졌고,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늘었습니다.
제가 명상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30-40여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랐답니다.
명상이라는 용어는 생경하기 그지 없었고, 요가는 머나먼 이상한 나라의 괴상한 몸동작을 바탕으로 한 써커스처럼 보였죠. 연정원이라는 전통 수도단체(선도)의 이야기를 담은 '단' 이라는 책이 독립문을 맨몸으로 뛰어넘었느니 무슨 도술을 부렸느니 하는 신기한 이야기책으로 많이 팔려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불교는 불교 나름대로 전통적인 간화선(화두)을 바탕으로 맥을 잇고 있었죠.
다만 사회적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21세기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지금도 명상이라고 하면 아직도 조금은 '이상한' 혹은 '사이비' 라는 이미지로 채색되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상에 대해 종교를 떠나서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상식적인 바탕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사이비와는 전혀 관계 없는 4대 종교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겠죠.
보통 종교라고 하면 세계 4대 종교 -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 를 이야기합니다.
일단 기독교(카톨릭과 개신교를 합쳐서 이르는 용어)와 이슬람교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이슬람이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터번을 두른 중동 사람들이 떠오르죠. 잘 모르고 본다면 우리 눈에는 겉보기에 정상적인(?!) 차림새를 한 기독교인들과는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입니다.
이 글은 종교에 대해 깊이 논의하는 목적이 아니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대해 간단히 가장 큰 차이만 언급하자면 '예수' 라는 인물을 삼위일체의 신급으로 보느냐 (기독교의 관점), 아니면 그저 여러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보느냐 (이슬람의 관점)가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가장 큰 공통점은 기본적인 주연급 캐릭터들이 같다는 점(예수, 모세 등)도 놀라운 부분일 수 있겠지요. 유일신을 숭배하는 점도 같지만 각각 그 이름이 다르지요 - 여호와와 알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독교는 뭔가 정상적이고 이슬람교는 이상해 보인다?는 편견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깨뜨려보자는 의미에서 이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는 명상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갑시다. 카톨릭에는 묵상이라는 방편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기독교에 '명상'은 없고 '기도' 가 중요한 방편이 되겠네요. 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하죠. 메시지(?)를 보내기는 하지만 응답률은 아주 저조하지만요.
다음으로 힌두교를 살펴보면요.
힌두교는 인도를 기본으로 발전되어온 전통적인 종교입니다.
힌두라는 말에서 Hindu는 첫글자인 H가 묵음이고 이것이 변형되면서 India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힌두교가 모태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는 개종해서 이슬람교이기도 하기에 인도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지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크리슈나, 시바, 칼리, 하누만, 가네샤 등등 수많은 신들을 언급하기에 다신교 신앙이라고 하죠. 인도에도 이런 힌두교와 이슬람교 외에도 비교적 소수의 자이나교 등이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명상 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도죠.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도교나 성리학 등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도 아닌 인도일 겁니다. 비교적 근대까지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크리슈나무르티, 요가난다, 오쇼 등... 걸출한 온갖 명상가들이 배출된 나라가 인도이지요. 비록 그들이 큰 수준 차이는 있을지라도요. 인도는 전통적으로 영적인 자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자아를 찾고자 하는 무의식적 열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힌두교를 언급했지만 고대로 올라가면 힌두교의 전신은 브라만교로써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체계(힌두교 브라만교)에 있어서 명상의 목적은 참나(아트만)를 찾아서 브라만(범아, 우주전체)과 합일하는 것입니다. 현대까지 전해지는 힌두교에도 이런 정신이 녹아있고요.
정리하자면 인도 명상의 근본 목적은 '참나를 찾는 것' 입니다.
이번에는 2,600년 전의 붓다 생존 시기의 인도로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이 때도 브라만교 (범아일여, 합일) 정신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온갖 교파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 시대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자이나교의 교주인 마하비라도 이 때 인물인데요.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당시 인도의 기존 사상들을 근본에서부터 완전히 엎어버립니다.
그게 뭐냐면 한마디로
'참나는 없다' 는 것입니다.
많이들 아실 테지만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 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 가지 현상적 진리(엄밀히 말하면 진리는 아니고 - 진리는 사성제이므로) 라는 것인데 보통은 - 무상, 고, 무아라고 하지요.
무상無常 Anicca/아니짜 - 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다.
고苦 Duhka/두카 - 괴로움, (두카는 원래 불만족성 이라는 뜻)
무아無我 - Annata/아나타 -
* 무아/아타나 - 이건 좀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An-atta 인데 빨리어(붓다 당시 언어) atta는 산스크리트어로 atman(위에서 언급한 아트만, 참나) 이고 접두어 An-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즉 '참나가 아니다' 라는 것이죠. 우리 흔히 A는 없다가 아니다 가 아니라 A는 아니다 라고 하면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 부분도 붓다의 설법이 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오취온이라고 해서 색수상행식(물질 느낌 인식 형성/의도 의식) 이렇게 다섯가지라고 알려주셨거든요. 이 오취온 혹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그 어떤 것도 atta가 아니라고 하신 겁니다.
또 이런 설법도 있습니다.
형성된 세계가 있는 반면에 형성되지 않은 세계가 존재한다.
(이 형성되지 않은 세계를 불사의 세계라고 종종 표현하시죠)
무상한 것은 무엇인가요?
제행무상! - 형성된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형성되지 않은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가리킨 궁극의 자리입니다.
육도윤회 -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인간, 천상을 초월한 - 불사의 세계죠.
이것을 어떤 한계 지어진 존재들(신이고 뭣이고 간에)이 있는 세계로 상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궁극의 세계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곳입니다.
가기위한 방편이 팔정도이고 이 체계 전체의 이해를 아우르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명상은 팔정도의 한 부분이죠.
이야기 전개가 붓다의 가르침으로 조금 깊이 들어온 감이 있네요.
정리하자면 제가 기존 명상의 한계를 넘어서 그 뿌리가 불교에 있으니 '좀 더 알고 보자' 고 마음 먹고 넘었던 불교의 울타리는 너무나도 방대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한국 내지는 중국의) 선불교, 티벳의 밀교, 남방 불교 등이 한편으론 유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금강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능엄경, 법화경, 반야심경 등등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죠.
그렇다면 원래 붓다는 뭐라고 하셨을까?
그것이 빨리어 (음사로 기록된) 니까야이고 이것이 한역된 아함경입니다.
저는 감히 의도했습니다.
종교를 넘어서, 종교라는 틀 안에 갇히지 말고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바로 실천해보자!
제가 택한 명상의 길인 것이죠.
(오늘 글감은 여기까지입니다. ^^)
- 明濟 전용석
한흐름 마음비움센터 I 한흐름 기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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