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웨이
(3) 명상만으로는 부족하다 - 체계적인 수행의 길
필자가 처음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시절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명상은 대중적인 관심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불교를 통한 수행의 흐름이 맥을 이어왔다. 미국 등을 비롯한 서양의 경우에도 오컬트나 신지학이라든지 히피문화 등을 바탕으로 문명에 대한 저항과 자연에의 회귀 사상 등을 이어온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특히나 한국의 경우 명상이란 어디까지나 특정 종교 내의 일일뿐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만한 분야는 아니었을 것이다. 6.25라는 크나큰 내전을 겪은 후 먹고 살기에 바쁜 시절이었다.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이론이 보여주는 바처럼 생리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애정과 소속의 욕구 - 존경의 욕구가 채워지면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발현된다. 물론 매슬로우의 욕구이론 뿐만 아니라 모든 이론에는 이견이 있다. 이런 5단계가 항상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1960-70년대를 거쳐 전쟁으로 모든 것이 허물어진 사회 기반을 재구축하는 시기를 지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생리적, 안전의 욕구를 만족한 상태였기에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대중적인 관심이 드러난 계기가 김정빈 작가의 '소설 단丹' 이 베스트셀러가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소설 단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후로 - 물론 이전에도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단체들은 늘 존재해왔다 - 온갖 크고 작은 수련 단체들, 명상 단체들, 사이비 단체들, 그리고 서적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2,000년 이후 인터넷이 대중화된 후에는 그야말로 정보의 폭발이나 다름 없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명상이나 수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팔뚝에 대바늘을 꽂고 물통을 들어올리는 차력 같은 행위를 먼저 떠올렸다. 그야말로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았고 모두가 사이비로 매도되었다. 그나마 2,020년을 코앞에 둔 지금은 명상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도 많이 완화된 편이다. 명상이라고 하면 마음의 평화를 먼저 떠올릴 정도는 되었으니까.
이런 저런 짧은 역사적 바탕을 두고, 연유야 어찌 되었든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진다.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럴 것이다. 마음에 잘 낫지 않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치유해보려고 그런 이유도 있으리라. 마음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믿음으로도, 어려운 현실적 문제들을 초능력으로 쉽게 풀어보고자, 더 쉽게 좋은 집과 차 등 부를 얻으려고, ...... 결국 명상에 대한 관심의 바탕에는 대체로 현실적인 욕심이 깔려있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현실 세계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세계들이 함께 중첩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런 다중의 세계간에 큰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필자가 10년이 넘게 천 건이 넘는 에너지장을 점검하면서 경험적으로 발견한 사실 중 하나는 현실의 일에는 현실적 에너지를 써야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현실적 물질적인 결과를 얻고자 명상 등을 통해서 마음의 에너지를 과다하게 쓰면 영적인 영역(에너지장)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영적인 영역은 강의 상류와 같고 물질적 현실적 영역은 강의 하류와 같다. 강의 상류에서 오염물을 발생시키면 반드시 하류도 오염될 수 밖에 없다.
현대의 불교계는 (과거 어느 시대인가부터 마찬가지였으리라) 극히 일부의 종파를 제외하고는 붓다 재세시의 승가와는 많이 다른 모습임이 틀림 없다. 붓다께서 생존해 계시던 당시의 출가승들은 대부분 탁발(걸식) 등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 이 때에도 역시 타락한 수행승들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붓다께서 예언하셨다고 전해지는 불법 쇠퇴의 500년 주기설이 존재한다. 첫 500년은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라 불린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정법(正法)이 가장 밝게 서 있는 때이다. 그 다음 500년은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다. 즉각 깨달음을 얻는 이는 매우 드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때라고 한다. 그 다음 500년은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로 신심을 가지고 경전을 읽고 외우는 이들은 많지만 바른 수행을 하는 이는 드물다. 그 다음 500년은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로 바른 수행은 거의 사라지고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시대다. 그 다음 500년은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로 불법이 거의 쇠퇴하고 절의 재산을 갖고 싸우고 다투며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며 분열하는 시기를 뜻한다.
서기 2,019년인 올해는 불기 2,563년으로 투쟁견고의 시대쯤에 속할 것이다. 불법은 쇠퇴했고 명목상 불교라는 테두리 내에서도 바른 수행의 본을 찾기는 힘들다. 더군다나 대승불교 안에서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찾기 어렵다. 어떤(전부? 혹은 일부?) 대승교단은 불교는 붓다를 시초로 하여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견해는 붓다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긴 초기경전은 발전된 대승의 가르침에 비하면 어리석고 원시적이라고 볼 정도이다. 반대로 그나마 붓다의 가르침을 본래 모습 그대로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경우 대승불교에 대해 불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 정도라 한다(다만 공식적인 입장에서 반박하지는 않고 무시로 일관하는 중이라고...).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라 아니할 수 없다.
붓다께서는 모든 제자들이 철저하게 출가승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설하지는 않으셨다. 재가신도나 재가수행자들은 기본적인 계목들(예를 들어 오계가 있다 - 살생금지, 절도금지, 사음금지, 거짓말금지, 음주금지)을 잘 지키며 바르게 생활하며 생계에 최선을 다하라 하셨다. 그렇게 얻은 재산 중 일부는 생활에 쓰고 나머지는 사업에 재투자하고 보시하라 하셨다. 초기경전에 언급되고 있는 붓다 재세 당시의 걸출한 재가자 중에는 지금의 시대라면 재벌에 가까울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놀라울 정도다. 부인이 아랫마을 청년이 마음에 든다며 재가를 보내달라 하니 많은 재산을 떼어주며 보내줄 정도였다 한다. 지금 이 시대에 보아도 놀라울 일이지만 2,500년 전 인도의 사회상을 고려해본다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명상이나 수행에 관심이 있기는 한데 바른 수행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꾸준히 수행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편하게 돈을 벌어보려는 마음은 산더미 같다. 그런 욕심에 비해서 능력은 부족하고 끈기와 성실성이 없기에 어느 한 직업에 오래 머무르는 일도 드물다. 이 직장 저 직장 수시로 옮겨다닌다. 방 구석에 틀어박혀 은둔자 같은 생활을 하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쉽게 돈이 들어올만한 일은 없는지 명상(심상화)이나 기도만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로 돈이 존재하는 밭에 가야 한다. 둘째로 그런 돈밭에서 가서 굴러야 한다. 대충 구르면 안된다. 돈이 붙을 수 있도록 바르게 굴러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바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자면 또한 전문적인 기술이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없다면 진입장벽이 낮은 돈밭 - 거의가 영업이라 부르는 분야이다 - 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바른 노력을 통해 상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폼나는 사업이라 해도 기본 바탕은 영업에 달려있다.
그런데 여기에 영적인 법칙이 개입되면 이상하게도(?) 영적인 에너지 상의 문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즉 돈을 벌려면 정석대로, 현실적인 법칙대로 벌려고 해야지 다른 편법(?)을 쓰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가자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만 그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최선을 다해 내려놓는 것이 좋다. 그래서 기본적인 계목을 지키고 수행은 수행대로 시간 내어 최선을 다하면서 행하면 된다.
필자가 지은 여러 서적들에서 강조한 바대로, 모든 노력에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였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왕자(王字) 복근을 만들고 몸짱이 되려 해도 바른 섭생과 운동 방법 등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바른 수행에 있어서야 그 중요성을 어찌 간과할 수 있겠는가. 단순히 수행과 명상에 관심이 있다고 하여 이 책 저 책 닥치는대로 읽고 이 단체 저 단체, 이 방법 저 방법 닿는대로 옮겨다니면 그야말로 건달(乾達)이다. 이렇게 계속 하는 것은 발전이 없고 바른 길로 정진해 나아가지도 못한다. 반드시 체계적인 수행을 필요로 한다.
*건달은 사전적으로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을 뜻하지만 재미있는 속뜻과 유래가 담겨있다. 건달은 한자로 하늘 건乾자에 통할 달達자를 쓴다. 하늘에 닿는다는 뜻이다. 원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Gandharva(간달바)라 하며 Gandabba(간답바)라고도 불린다. 초기불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존재이다. 음악을 관장하는 신이며 (반신半神 이라고도 한다) 허공을 떠돌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존재라 알려져 있다.
어느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하지만 곧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다른 산을 오른다. 그리고 당황한 장군은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아까 그 산인 가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우스갯 소리이기는 한데 뼈가 담긴 말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 '열심히' 달려가기는 하지만 그 길이 곧 벼랑으로 곤두박질 치는 길이라면 그 열심과 성실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겠는가? 바른 길을 일찍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또 절실하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바른 길인지 모른다는데 있다. 엉뚱한 길을 걸으며 바른 길이라 믿을 수도 있다. 한참(어쩌면 수백 수천 수만년이라도)을 돌아가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길이 바른 길이라 믿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 작은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한 번의 생만을 돌아본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생은 그렇지 않다. 과거생을 '전생' 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만 전전생, 전전전생, ... 끝없는 전생은 존재한다. 미래생을 '내생' 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끝없는 미래생이 펼쳐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도둑으로 살면서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 상윳따니까야
생의 표본의 수를 무한히 늘려보면 결국 길은 하나다. 어떻게 이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괴로움에서 탈출할 것인가? 답은 '바른 수행' 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체계적인 방편'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런 표현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명상계' 라고 이름 붙여보자. 그러면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권위자인 사람은 누구일까?
......
그는 다름아닌 붓다다. 여기에는 누구라도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과학문명은 세월이 흐를 수록 발전했지만 수행은 문명이 아니다. 어느 문명, 어느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나올까 말까 한 현인이 미리 걸어가 닦아놓은 길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에 코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투쟁견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의식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감각적 정보들을 단속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그러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더더욱 체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을 가장 간단히 표현하면 그것은 계정혜(戒定慧)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계는 지켜야 할 것을 뜻한다. 정은 선정 즉 삼매를 뜻한다. 혜는 지혜라고 표현하는데 원어는 pannya(반야)이며 통찰지를 의미한다.
[세존]
촌장이여, 가르침의 삼매가 있습니다. 그대가 거기서 마음의 삼매를 얻으면 그대는 의혹의 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촌장이여, 가르침의 삼매란 어떠한 것입니까?
촌장이여, 이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합니다.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을 포기하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을 삼가합니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이간질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포기하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탐욕을 내는 것을 포기하고 탐욕 없이 지냅니다.
분노하는 것을 포기하고 분노 없이 지냅니다.
잘못된 견해를 포기하고 바른 견해로 지냅니다.
촌장이여, 그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탐욕을 떠나고 분노를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바로 알고 마음에 새겨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 쪽 방향을 충만시키고 마찬가지로 두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세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네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경우 모든 곳에 일체의 세계를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원한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시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생각합니다. '이 스승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시도 없고, 희생 제도 없고 제사도 없고 선악의 업보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중생도 없다. 올바로 유행하며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그것을 선언하는 수행자 성직자도 없다' 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존경스런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도
나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떠한 것도 해치지 않고 그 양자에게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실로 신체적으로 절제하고 언어적으로 절제하고 정신적으로 절제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그는 희열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면 그에게 기쁨이 생겨납니다.
기쁨을 느끼면 몸이 경쾌해지고 몸이 경쾌해지면 지복을 느끼게 되고 지복을 느끼면 마음이 집중됩니다.
촌장이여, 이것이 가르침의 삼매입니다.
거기서 그대가 마음의 삼매를 얻으면 그대는 이와 같이 의혹의 법을 버릴 수 있습니다.
- 상윳따니까야
위의 글은 세상의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혹을 느끼는 촌장에게 스승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계를 지키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잘못된 견해)을 내려놓으면 죽은 뒤 좋은 곳에 태어나고 삼매를 얻을 것을 세존께서 설하는 내용이다. 이후의 지면을 통해 살펴보게 되겠지만 통찰지는 삼매를 기반으로 하여 생겨난다. 즉 전체적인 여정을 간단히 이해하면 계를 기반으로 정(삼매)이, 정을 기반으로 혜(반야)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완성됨으로써 열반과 해탈에 도달하게 된다.
제목에서 명상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였다. 글을 전개하는 도중에 명상에 관심을 가지는 건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가장 수준 높고 체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하였고 그 기본적인 바탕이 계정혜라 하였다. 정계혜가 아니고 계정혜이다. 시작점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명상(선정, 삼매, 참선)이기에 앞서서 계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명상계' 라고 표현하길 좋아하는 많은 건달들이 명상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자만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막상 지켜야 할 기본적인 계목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도 갖추지 못하고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보통 계율이라 표현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계와 율은 의미가 다르다. 계는 도덕적인 의미에 가깝고 율은 출가승들이 강제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을 뜻한다. 불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들은 계율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이 그렇고 이슬람교나 힌두교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도덕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들은 계를 추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수행의 바탕이 되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지면을 통해 보다 상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불교를 비롯해 어느 종교에서도 이렇게 계를 지킴으로써 선(善)을 추구하고, 그런 결과로 천상계(비록 천상계 중 낮은 단계일지라도)에 태어날 수 있게 된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명상과 지계(계를 지킴)의 관계에 대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작은 생물이라도 생명을 경시하며 살생을 일삼는 이가 깊은 명상에 들 수 있을까?
빛에 반응하여 이끌리는 작고 우매한 단세포동물이 있다고 떠올려보자. 이 작은 생명은 어째서 빛을 향할까? 빛으로부터 '좋은 느낌' 이 있기 때문일 것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 생명은 행복을 찾아 움직이며 살고자 몸부림친다. 고통을 회피하려 한다. 하물며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곤충, 식물, 동물 등 나름의 지능을 가진 개체들은 오죽할까. 살생에서 일어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파장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반드시 전해진다. 이런 흔들림은 명상에 장애가 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직접적인 계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어 도박하는 이가 그런 흔들리는 마음으로 명상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얼마나 될까?
이름은 괜히 이름이 아니다. 모든 이름에는 그 궁극적인 지향점과 통찰이 담겨있다. 이름이라는 글자를 우리말식으로 풀어보면 이르다 (어떤 장소나 상태에 도착하다, 도달하다) 라는 어근에 ㅁ(미음)이 붙어서 명사화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어딘가(궁극의 지향점)에 도달함'을 뜻하는 것이다. 우주만물 모든 개체는 고유의 이름을 가지며 그 본래의 목적(지향점)이 있다.
명상(冥想)이라는 행위에 대해 이름을 바탕으로 살펴보자. 명상은 어두울 명冥자에 생각 상想자를 쓴다. 생각을 어둡게, 즉 생각을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요즘 명상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방법들을 살펴보면 주로 어떤 것을 심상화해서 떠올리거나 (예를 들어 좋은 이미지나 빛 등),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등의 행위를 뜻한다. 여러 가지 방편들에 대해 명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은 결국 삼매이다. 위에 인용한 상윳따니까야의 구절을 통해 전해지는 붓다의 말씀처럼 '마음이 집중' 되고 그것이 '삼매' 라 하였다. 여덟단계의 전체 삼매 중 초선에서 4선까지를 일심삼매라 하여 어떤 하나의 수행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뜻하며, 5선인 공무변처, 6선인 식무변처, 7선인 무소유처, 8선인 비상비비상처까지는 무심삼매라 하여 마음이 사라져버린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각각의 삼매를 증득함에 따라 그에 맞는 정도의 반야가 개발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상수멸(멸진정)이라고 하는데 이를 얻으면 열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본다.
붓다께서 임종하실 때 초선부터 팔선까지, 그리고 팔선에서 다시 초선으로 순서대로 드신 후 다시 2-3-4선으로, 4선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편에서 언급하였다. 이렇게 붓다께서 직접 보여주고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정에도 온갖 이설과 잡음들이 함께한다. (특히) 현대에는 여기에 도달한 이가 없다. 어찌보면 간단하고도 명확한 길처럼 보이지만, 이 길이 아니라는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붓다께서 입멸하신 후 2,500년이 지났고, 우리는 지금 투쟁견고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앉아있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붓다께서 또 다른 경전을 통해 설하신 바처럼, 사방 팔방 십방, 모든 방향에서 벽이 좁아지고 있다. 어느 위대한 왕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결국에는 죽음의 벽이 우리를 압사시킬 것이다. 결국 처음 시작한 자리인 근원 - 열반 해탈 - 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괴로움은 영원히 계속되고야 만다.
믿을만한 체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그 길이 초기경전에,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 담겨있다고 본다.
탐진치를 뿌리뽑으면 무위이고 해탈이다.
- 붓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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